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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부: 흑셔츠와 스바스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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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90 11/1 24-27면

저울에 달린 인간 통치

제6부: 흑셔츠와 스바스티카

파시즘: 국가의 경제 통제, 획일적 사회 조직, 호전적 국가주의 이념을 특징으로 하는 독재 정치에 의한 정부; 나치즘: 히틀러 지배하의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실시한 파시즘.

일반적으로 “파시즘”이란 말을 들으면 흑셔츠의 이탈리아 군대 그리고 스바스티카 휘장의 갈색 제복을 입은 독일 돌격대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 역시 파시즘을 경험한 일이 있다.

파시즘은 1930년대에 헝가리, 루마니아, 일본에서 세력을 얻었다. 스페인 내란중에는 파시스트의 지원 덕분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프랑코의 독재 정치(1939-75년)를 본질상 순수한 파시즘으로 보지 않는다. 반면에, 후안 D. 페론이 확립한 아르헨티나 독재 정치(1943-55년)는 파시즘이었다.

국가 숭배

“파시즘”이란 말은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대 로마의 권위의 상징물을 가리킨다. 라틴어로 파스케스(fasces)라고 하는 그 물건은 도끼 날이 돌출된 막대 묶음인데, 국가의 최고 권위 아래 백성의 연합을 나타내는 적절한 상징물이었다.

파시즘의 뿌리 중 일부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가 태어난 지 450년이 지난 1919년이 되어서야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그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권위주의 통치자, 다시 말해서 권력을 가차없이 그러나 분별있게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당시의 정치적 타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파시스트 정부가 효과적이 되려면 바로 그와 같이 강력하고 기회주의적이며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 적절하게도,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둘 다 단지 “지도자”—일 두체 및 데어 퓌러—로만 알려졌다.

파시즘은 국가를 다른 모든 권위보다, 종교적 권위나 시민의 권위보다도 더 높은 것으로 여긴다. 16세기 프랑스의 법학자 장 보댕,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 그리고 18세기와 19세기 독일의 철학자들인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 등은 모두가 한결같이 국가를 예찬하였다. 헤겔은 국가가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며 개인의 지고의 의무는 국가의 충성스런 지지자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모든 정부는 그 본질상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파시스트 국가는 그 권위를 최대한으로 행사하고 맹목적 순종을 요구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트라이치케는 인간을 국가의 종에 불과한 존재로 여기어 “순종을 하는 한, 무엇을 생각하는가는 문제가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 전형적인 예로, 프랑스 혁명중에 들렸던 “자유, 평등, 박애”의 외침을 파시즘은 “믿음, 순종, 싸움”이라는 이탈리아식 구호로 대치하였다.

파시즘의 전쟁 예찬

싸움? 그렇다! 무솔리니는 한때 “전쟁만이 인간의 모든 에너지를 최고 상태로 고조시키며, 전쟁에 나설 용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고상함의 인을 쳐준다”고 말하였다. 또한 “전쟁과 남자의 관계는 모성애와 여자의 관계와 같다”고 덧붙였다. 무솔리니는 지속적인 평화가 “사람의 모든 근본적 미덕을 억압하고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무솔리니의 그러한 말은 트라이치케의 견해를 그대로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트라이치케는 전쟁이 불가피한 것이며 세상에서 전쟁을 없애는 것은 몹시 부도덕한 일일 뿐 아니라 “인간 영혼의 본질적이고 숭고한 힘의 많은 부분을 위축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전쟁과 독재 정치에 관한 이러한 배경에 비추어 볼 때, 많은 역사가들이 근대 파시즘의 시작을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1800년대 초의 독재자였던 나폴레옹 자신이 파시스트가 아니었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정책의 많은 부분, 이를테면 비밀 경찰 제도 설립과 교묘한 선전술 사용 그리고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검열 등은 나중에 파시스트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그의 결심은 분명히 국가의 위대함에 대한 집념의 전형적인 예인데,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그러한 집념으로 널리 알려졌다.

1922년 무렵,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는 무솔리니를 국무 총리로 임명할 만큼 강력해졌다. 무솔리니는 그 지위를 독재자가 되는 디딤돌로 재빨리 이용하였다. 임금, 시간, 생산 목표에 관한 한, 사유 기업은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야 했다. 사실상, 국가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만 사기업이 장려되었다. 파시스트 이외의 정당은 불법화되었고, 노동 조합은 금지되었다. 정부는 언론 매체를 교묘하게 통제하면서, 검열을 통해 반대자들을 잠잠하게 하였다. 청소년을 교화시키는 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개인의 자유는 심하게 위축되었다.

독일형 파시즘

“권력을 획득한 방법에는 유사점이 있었지만,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은 그 체질과 미래상에 있어서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고 A. 캐슬스 저 「파시즘」 책은 알려 준다.

파시스트 사상의 선구자 역할을 한, 앞서 언급한 독일 철학자들 외에도,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사람들이 독일 특유의 파시즘을 만들어 내는 데 한몫을 하였다. 니체가 파시스트였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엘리트 통치자, 초인(超人)의 종족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그러한 말을 할 때 하나의 인종이나 민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으며, 독일인을 염두에 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니체는 독일인에 대해 특별한 호감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 일부는 국가 사회주의 이념가들이 이상적 독일인으로 여긴 것과 흡사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사상들은 채택되어 이용되었고, 나치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은 버려졌다.

히틀러는 또한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극도로 국가주의적이고 애국적이던 바그너는 독일이 세상에서 위대한 사명을 수행할 운명을 받았다고 생각하였다. “히틀러와 나치 이념가들에게 바그너는 완벽한 영웅이었다”고 「제삼 제국 백과 사전」(Encyclopedia of the Third Reich)은 말한다. “그 작곡가는 독일의 위대함의 전형을 표현하였다. 히틀러의 견해로, 바그너의 음악은 독일의 국가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고 그 책은 설명한다.

저술가 윌리엄 L. 샤이러는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현대 독일의 신화에 영감을 불어넣고, 히틀러와 나치스가 얼마의 정당화 과정을 거쳐 자기들의 이념으로 받아들인 게르만 민족의 벨탄샤웅[세계관]을 독일에 부여한 것은 그의[바그너의] 정치 저술물이 아니라, 영웅 신화, 이교의 신들 및 영웅들과의 싸움, 악귀들과 용들, 피흘리는 반목과 원시 부족의 법전, 운명관 및 사랑과 생명의 현란함 그리고 죽음의 고귀함이 나타난 독일 고대사를 너무도 생생하게 회상하는 그의 탁월한 오페라들이었다.”

니체와 바그너 두 사람의 사상은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민족학자인 콩트 조제프 아르튀르 드 고비노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고비노는 1853년에서 1855년 사이에 「인종 불평등론」(Essai sur l’inégalité des races humaines)을 썼다. 그는 인종의 구성이 문명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안 사회의 인종적 특성이 희석되면 결국은 그 사회가 몰락하고 말 것이라고 그는 경고하였다.

이러한 사상에서 발전된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가 독일형 파시즘의 특징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 두 가지 정책 모두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 되었다. 사실, 많은 이탈리아인들은 이탈리아에서 반유대주의를 나타내는 행동을 파시즘 배후의 지배적인 세력으로서 무솔리니를 대신하려는 히틀러의 시도의 표시로 여겼다. 실제로, 시간이 흐르면서 이탈리아 파시즘 정책에 대한 히틀러의 영향력은 증가하였다.

국가의 위대함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면에서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파시즘은 반대 방향으로 가는 듯이 보였다. 저술가 A. 캐슬스는 “무솔리니는 그의 동포들에게 고대 로마인의 행동을 본받으라고 권한 반면에, 나치의 정신 혁명은 독일인들로 하여금 먼 옛날 튜튼족의 거인들이 했던 일을 할 뿐 아니라 20세기에 화신한 그들과 같은 부족의 영웅이 될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말하자면 산업 저개발 국가인 이탈리아를 20세기로 끌어올림으로써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반면에 독일은 신화 속의 과거로 되돌아감으로써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대부분의 나라에서, 파시스트는 국가적 재난이나 경제적 붕괴 또는 군사적 패배 후에 권력을 잡았다. 이탈리아와 독일 두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는 반대 편에서 싸웠지만, 두 나라는 모두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두 나라 모두 국가주의자들의 이견, 경제적 혼란, 계급 투쟁의 심화로 시달렸다. 독일은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와 치솟는 실업률을 경험하였다. 또한 민주주의 원칙도 약해서, 프러시아의 군사 및 권위주의 전통이 여전히 걸림이 되었다. 그리고 소련 볼셰비즘에 대한 두려움의 망령이 어디에나 있었다.

찰스 다윈의 진화 및 자연 선택 사상은 파시즘의 출현을 초래한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었다. 「컬럼비아 세계사」(The Columbia History of the World) 책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에 의해 표현된 파시스트 이념으로 사회 다윈주의가 다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삼 제국 백과 사전」은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여, 사회 다윈주의가 “히틀러의 대량 학살 정책 배후의 이념”이었다고 설명한다. 다윈의 진화론 가르침과 일치하게, “독일의 이념가들은 현대 국가가 약자를 보호하는 일에 그 에너지를 탕진할 것이 아니라 강하고 건강한 요소들을 위해서 열악한 사람들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전쟁이 적자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정상적인 것이며 “승리는 강자에게 돌아가고 약자는 멸절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훈을 배웠는가?

흑셔츠의 이탈리아 군대 그리고 스바스티카 휘장의 갈색 제복을 입은 독일 돌격대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나 1990년에도 파시즘의 흔적은 남아 있다. 2년 전 「뉴스위크」지는 실제로 모든 서유럽 나라에서 “정체를 거의 그대로 드러낸 인종주의 그리고 국가주의와 권위주의 가치관을 옹호하는 주장이 여전히 놀라운 지지를 얻을 수 있음을 극우 세력들이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틀림없이 그러한 운동 중 으뜸가게 활기찬 것은 기본적으로 “국가 사회주의와 동일한” 주장을 하는 장-마리 르 펭의 프랑스 국민 전선일 것이다.

신파시스트 운동을 신뢰하는 것이 분별있는 일인가? 파시즘의 뿌리—다윈의 진화론, 인종주의, 군국주의, 국가주의—는 훌륭한 정부의 토대가 될 만한 건전한 기초인가? 아니면 파시즘도 다른 모든 인간 통치와 마찬가지로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드러난 것인가?

[26면 네모]

파시즘—그 기초는 건전한가?

다윈의 진화론: “점점 증가하는 수의 과학자들, 아주 특이하게도, 계속 증가하는 수의 진화론자들이 ·⁠·⁠· 다윈의 진화론은 진정한 과학 이론이 결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뉴 사이언티스트」, 1981년 6월 25일, 마이클 루즈.

인종주의: “인종과 사람들 사이에 간격이 있다면 그 간격은 심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지 유전적인 것은 아니다.”—「유전자와 인간」(Genes and the Man), 벤틀리 글래스 교수.

“모든 인류는 ·⁠·⁠· 동일한 첫 인간의 후손이다.”—「유전과 인간」(Heredity and Humans), 과학 저술가 앰럼 셰인펠드.

군국주의: “이러한 ·⁠·⁠· 미친 일에 재능과 노력과 재물을 쏟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안이 벙벙해지게 한다. 만일 나라들이 더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다면 인류가 할 수 없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미국의 저술가이며 퓰리처 상 수상자인 허먼 워크.

국가주의: “국가주의는 인류를 서로 용납하지 않는 집단으로 나누어 놓는다. 그 결과 사람들은 미국인, 소련인, 중국인, 이집트인, 또는 페루인 등의 각도로 먼저 생각하고, 인류라는 각도로는 둘째로, 아니 거의 생각지도 않는다.”—「국가간의 분쟁과 협조」(Conflict and Cooperation Among Nations), 이보 두카세크.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허다한 문제는 그릇된 태도에 기인하거나 그 결과이다. 그중 어떤 태도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갖게 된 것들이다. 이 가운데 한 가지는 ‘옳든지 그르든지 내 나라’라는 편협한 국가주의 사상이다.”—전임 UN 사무 총장 우 탄트.

[25면 삽화]

스바스티카 같은 고대 종교 상징물이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구호는 히틀러의 통치를 구원하지 못하였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상징물인 파스케스를 일부 미국 주화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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